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Balzac)의 소설 ‘골짜기의 백합’은 청년 귀족인 펠릭스가 아름다운 백작 부인 앙리에트를 사랑하는 내용이다. 펠릭스는 앙리에트를 ‘골짜기의 백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소설의 제목(영어로 Lily of the valley)을 ‘골짜기의 백합’으로 번역한 것은 ‘은방울꽃’의 오역이라는 주장이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이런 주장이 적지 않다.
오역이라는 주장은 영어로 ‘Lily of the valley’가 명사구로 은방울꽃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영한사전에서 ‘lily of the valley’를 넣어보면 은방울꽃이라고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성경과 찬송가는 영어 성경과 영어 찬송가에 나오는 ‘Lily of the valley’를 백합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은방울꽃의 오역이라는 주장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도 ‘무궁화’를 일컫는 영어 이름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40여 년 전 기사 내용도 오역의 방증(傍證) 중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중앙일보 1975년 5월2일자 파리특파원 기사에서 “프랑스에서는 지금 발자크의 붐이 일어나 그의 소설 ‘산골짜기의 백합’이 인기 절정에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 다음 “이런 복고조의 무드는 양장점의 쇼윈도에서도 볼 수 있는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백합이 아닌 은방울꽃으로 그 무드를 조성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보도했다. 소설의 배경지인 투렌 지역에서는 해마다 백합이 아닌 은방울꽃 잔치를 열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맞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국내 번역본 ‘골짜기의 백합(을유문화사)’을 읽어보았다. ‘그녀는 이 골짜기의 백합’, ‘백합은 항상 내가 마음속으로 그녀를 빗대는 심상’이라는 문장도 있었고, ‘자주빛 은방울꽃’처럼 은방울꽃을 별도로 쓴 문장도 있었다. 내 실력으로는 판단하기 역부족이었다. 원어로 읽으면 좀 감이 잡힐 것 같았지만 프랑스어를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을 번역한 진형준 전 홍익대 불문과 교수(한국문학번역원 전 원장)에게 문의해 보았다. 진 교수는 “책 제목은 ‘골짜기의 백합’이 정확한 것이고 은방울꽃이라고 하면 틀린 번역”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어로 ‘Le Lys dans la vallée’가 은방울꽃을 의미하는 것은 맞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소설 제목은 ‘골짜기에 사는 백합 같은 여자’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나도 처음 인터넷 검색만 보고 오역 아닌가 의심했는데, 진 교수 설명을 듣고 그런 의심을 완전히 거두기로 했다. 마침 은방울꽃이 피기 시작하는 때라 소설 ‘골짜기의 백합’이 은방울꽃의 오역이라는 주장을 검증해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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