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야기

사루비아? 샐비어 그리고 ‘청춘의 방황’

우면산 2020. 6. 3.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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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다가오면서 샐비어(사루비아)꽃이 피기 시작했다. 어릴 적 샐비어 꽃잎을 빨아먹은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깨꽃’이라고도 부르는 샐비어는 꿀이 많아서 꽃잎을 빨면 단맛이 난다.

 

 

샐비어. 전엔 사루비아라고 부르기도 했다.

 

샐비어는 브라질이 원산지인 꿀풀과 식물이다. 여름에 꽃대가 나오면서 붉은 꽃이 차례로 핀다. 자세히 보면 꽃잎의 아래쪽은 통 모양으로 전체를 감싸고 위쪽은 두갈래로 갈라져 벌린 입술처럼 보이는 특이한 모양이다. 잎은 심장 모양으로 가장 자리에 톱니가 있는 것이 깻잎과 비슷하다. 사루비아 하면 80년대부터 해태에서 만든 막대형 과자 ‘사루비아’를 연상하는 사람도 많다. 전엔 ‘사루비아’라고 불렀지만 '샐비어(salvia)'가 바른 말이다. '사루비아'는 '샐비어'의 일본식 발음이다.

 

80년대 여대생의 방황을 그린 강석경의 소설 ‘숲속의 방’이 있었다. 1985년 나온 이 소설은 8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1992년 최진실이 소양 역을 맡아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소설에선 샐비어가 여주인공 소양의 방황을 담은, 이미지가 강렬한 꽃이다.

소설은 가족들이 소양이 휴학한 것을 뒤늦게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양은 교정에 핀 샐비어 붉은 꽃무리가 너무 강렬해서 휴학했다고 말한다.

 

<소양이 휴학할 생각을 한 것은 갑작스런, 즉 충동적인 것인듯 했다. 소양은 분명 등록금을 낼 생각으로 학교에 갔다. 덧없이 한 학기를 보냈으며 지겨운 학기가 또 시작됐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이 유별난 감정을 불러일으킨 정도는 아니었다.

등록금을 내러 많은 아이들이 몰려가고 있었다. 소양은 떼밀리듯 그들 속에 섞었다. 교문에서 학관으로 걸어들어가자 사루비아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고 표현할만큼 강렬했나 보다. 사루비아는 늦여름의 태양 아래 선혈을 뚝뚝 흘리고 있었고 소양은 강물처럼 밀려오는 붉은 꽃무리에 익사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휴학했단다. 그게 이유야.”

나는 입을 벌린 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사루비아에 얽힌 어떤 사건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늦여름 태양 아래 붉게 타오르는 사루비아 화단 한 장면이 전부라니, 또 선혈을 뚝뚝 흘리고 따위의 표현은 내 감정에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소설의 화자인 소양의 언니 미양은 ‘스페인 소도 아닌데 빨간 사루비아를 보고 충동을 받다니’ 어이없어하면서 소양이 휴학한 이유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소양이 학교와 사회 어느 곳에서도 삶의 진실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데모가 소양이의 주요 고민인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데모하다 잘려서 휴학한 건 아니냐고 묻자 소양은 “그런 뚜렷한 명분이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했다. 소양은 ‘쇠사슬같이 무거운 청춘을 탕진하기 위해, 그냥 바닥으로 내려갈 대로 내려가 보라고’ 술집 호스테스로 나가기도 했다.

미양이 남편와 함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 밤 소양은 자살한다. 운동권으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이기적인 삶을 살지도 못한채 중간에서 ‘회색인’으로 방황하다 자살에 이른 것이다.

 

‘숲속의 방’을 읽은 다음부터는 샐비어를 보면 그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붉은 샐비어꽃이 거리에 보이기 시작하면 소설과 함께, 고민도 희망도 분명치 않았던 대학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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