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우아하게 물결치는 보리밭, 박완서의 ‘자전거 도둑’

우면산 2021. 5. 24. 06:32
반응형

 

주말에 지방 다녀오는 길에 보리밭을 보았다. 바람이 불자 보리들이 우아하게 물결을 쳤다. 노랗게 익어가는 보리가 막 생기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보리밭을 보면 박완서가 쓴 동화 자전거 도둑이 생각난다.

 

보리밭.

 

이 동화의 주인공 수남이는 시골에서 상경해 청계천 세운상가 전기용품점에서 일하는 열여섯 살 소년이다. 고등학교에 가는 꿈에 부풀어 일하는 수남이가 고향을 그릴 때 생각하는 이미지는바람이 물결치는 보리밭이다. 그가 일하는 가게 골목에 심한 바람이 불자 수남이는 시골 풍경을 떠올린다.

 

<시골의 바람부는 날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보리밭은 바람을 얼마나 우아하게 탈 줄 아는가, 큰 나무는 바람에 얼마나 안달맞게 들까부는가,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함께 사는 숲은 바람에 얼마나 우렁차고 비통하게 포효하는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이 골목에서 자기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수남이를 고독하게 했다.>

 

한강변에 만들어놓은 보리밭. 지난해 모습이다.

 

그런데 주인 영감은 어느날 바람이 심하게 부는데도 배달을 다녀오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배달 나갔을 때 자전거가 바람에 넘어져 옆에 세워둔 자동차에 약간의 상처를 낸다. 차 주인은 수남이에게 수리비를 요구하지만 수남이가 내지 못하자 수남이 자전거를 묶어둔다. 이 시련 앞에서 수남이는 구경꾼들의 부추김에 따라 자물쇠를 채운 자전거를 들고 돌아오는 것을 택한다.

 

주인 영감은 수남이가 한 짓을 나무라기는커녕 잘했다고 칭찬한다. 하지만 수남이는 죄책감을 느끼며 도덕적으로 자기를 견제해 줄 어른을 그리워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내용이다. 수남이가 죄책감 때문에 귀향하려고 짐을 꾸릴 때도 다시 보리밭이 등장하고 있다. 동화 마지막 부분이다.

 

익어가는 보리.

 

<소년은 아버지가 그리웠다. 도덕적으로 자기를 견제해 줄 어른이 그리웠다. 주인 영감님은 자기가 한 짓을 나무라기는커녕 손해 안 난 것만 좋아서 '오늘 운 텄다'고 좋아하지 않았던가.

수남이는 짐을 꾸렸다. 아아, 내일도 바람이 불었으면. 바람이 물결치는 보리밭을 보았으면.

마침내 결심을 굳힌 수남이의 얼굴은 누런 똥빛이 말끔히 가시고, 소년다운 청순함으로 빛났다.>

 

초봄 보리밭 모습.

 

이처럼 보리밭은 이 동화에서 도시 생활을 하는 열여섯 살 소년에게 향수의 대상이자 순수했던 시절의 상징으로 나오고 있다. 내 또래 중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보리밭에 얽힌 추억이 많을 것이다. 어릴적 가을걷이를 끝내고 나면 바로 논에 보리를 심는 집이 많았다. 그러나 요즘엔 시골에 가보아도 겨울에 파란 보리밭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곳곳에 보리밭축제 같은 행사가 생겼을 것이다.

 

 

◇박완서 관련해 더 읽을거리

 

-박완서 소설 무엇부터 읽을까? 10주기에 추천하는 베스트5  

 

-꽃으로 박완서를 읽다(한길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