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고향 마을 양지바른 언덕에는 열녀문이 있었다. 그곳엔 담장가를 따라 배롱나무를 심어놓아 한 여름 내내 붉은 꽃이 피었다. 그래서 내게 배롱나무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열녀문에서 나오는, 어쩐지 처연한 느낌을 주는 나무였다. 요즘은 배롱나무를 집 정원이나 건물 화단에도 많이 심고 도심 가로수로도 심는다.
배롱나무꽃이 서울 도심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지만 배롱나무는 약 100일간 붉은 꽃이 핀다는 뜻의 ‘백일홍(百日紅)나무’가 원래 이름이었다. 그러다 발음을 빨리하면서 배롱나무로 굳어졌다. 꽃 하나하나가 100일 동안 피어 있지는 않다. 작은 꽃들이 연속해 피어나기 때문에 계속 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멕시코 원산의 ‘백일홍’이라는 초본 식물이 따로 있기 때문에 배롱나무를 그냥 백일홍이라 부르면 맞지 않다. 배롱나무를 목백일홍이라고도 부르고, 중국 이름이 '자미수(紫薇樹)'다.
배롱나무 꽃을 자세히 보면 꽃잎과 수술이 팝콘이 터진 것처럼 튀어나와 있다. 6개의 꽃잎이 있고 30∼45개의 노란 수술이 있는데 그중 가장자리 6개는 더 길고 안으로 굽는다. 꽃잎에는 주름이 많다. 붉은색이 많지만 흰색, 옅은 보라색 배롱나무꽃도 볼 수 있다.
원래 배롱나무는 주로 충청 이남에서 심는 나무였으나 온난화 영향으로 서울에서도 월동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서울에서, 최근 조성한 화단 등에서 배롱나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용산구 원효로와 구로구 등에는 가로수로 심은 배롱나무까지 볼 수 있다. 다만 월동을 위해 볏짚 등으로 나무줄기를 감싸 주고 있다.
배롱나무는 예부터 청렴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해서 서원과 서당 등에 많이 심었다. 선비들이 배롱나무를 보며 청렴 의지를 다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경북 안동 병산서원 주변 전체가 여름이면 배롱나무 꽃으로 붉게 물드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절 앞마당이나 무덤 옆에도 많이 심었다. 담양 명옥헌 원림(園林), 고창 선운사, 부산 양정동 동래 정(鄭)씨 시조묘의 배롱나무도 유명하다.
배롱나무는 나무껍질도 유별나게 생겼다. 얇은 조각이 떨어지면서 반질반질한 피부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나무 표피를 긁으면 간지럼 타듯 나무가 흔들린다고 ‘간지럼 나무’라고도 부른다. 배롱나무는 정말 간지럼을 타는 것일까. 실제로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배롱나무가 흔들리는데, 사람이 간지럼을 태우기 위해 나무에 다가갈 때 이는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나무 표면이 아주 매끈해 원숭이도 미끄러진다고 일본에서는 ‘원숭이 미끄럼나무’라고 부른다.
배롱나무는 앞으로 9월 말까지, 늦둥이는 10월 초까지 여름 내내, 진짜 100일 가까이 우리 곁에서 진분홍 꽃망울을 터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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