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1935년 주요섭이 ‘조광(朝光)’지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일찍 남편을 잃은 스물넷 어머니가 사랑손님을 마음에 두면서도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여섯 살 딸 옥희 시각으로 전하는 소설이다.
어머니가 사랑손님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옥희가 전해준 꽃이었다. 옥희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유치원에서 가져온 꽃을 엉겁결에 아저씨가 갖다 주라고 했다고 말해버린다. 그때 어머니 얼굴이 빨갛게 물들고 손가락은 파르르 떨린다.
<’오늘은 어머니를 좀 기쁘게 해 드려야 할 텐데. 무엇을 갖다 드리면 기뻐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문득 유치원 안에 선생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꽃병 생각이 났습니다. 그 꽃병에는 나는 이름도 모르나 곱고 빨간 꽃이 꽂히어 있었습니다. 그 꽃은 개나리도 아니고 진달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꽃은 나도 잘 알고 또 그런 꽃은 벌써 피었다가 져 버린 후였습니다. 무슨 서양 꽃이려니 하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중략)
"응, 이 꽃! 저, 사랑 아저씨가 엄마 갖다 주라구 줘." 하고 불쑥 말했습니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서 그렇게 툭 튀어나왔는지 나도 모르지요. 꽃을 들고 냄새를 맡고 있던 어머니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엇에 몹시 놀란 사람처럼 화닥닥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금시에 어머니 얼굴이 그 꽃보다도 더 빨갛게 되었습니다. 그 꽃을 든 어머니 손가락이 파르르 떠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무슨 무서운 것을 생각하는 듯이 방 안을 휘 한 번 둘러보시더니,
"옥희야, 그런 걸 받아 오문 안돼.">
꽃을 받은 어머니는 옥희에게 ‘이 꽃 얘기 아무보구두 하지 말아라’고 당부했다. 어머니는 옥희 예상과는 달리 그 꽃을 버리지 않고 꽃병에 꽂아서 풍금 위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며칠 후 꽃이 시들자 꽃을 잘라 찬송가책 갈피에 끼워 두었다.
꽃은 이 소설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마음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위 인용한 대목에서 보듯, 소설엔 꽃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위 인용 대목에서 보듯 ‘빨간 꽃’이라는 색만 나와 있다. 그런데 얼마 전 TV에서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1961년 작) 일부를 보여주었는데, 어머니 역할을 하는 배우 최은희가 꽃을 꽃병에 꽂는 장면이 있었다. 영화에서 사용한 꽃은 보세란 같았다. 영화 포스터를 보니 보세란을 보다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동양란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보세란(報歲蘭)이다. 대부분 푸젠·광둥성 등 중국 남부와 대만에서 생산해 국내로 들여온 것이다. ‘보세’는 ‘새해를 알린다’는 뜻으로, 1~2월에 집중적으로 꽃이 피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우리 야생화 중에서 흔히 ‘춘란(春蘭)’이라고 부르는 보춘화(報春花)가 가장 비숫하게 생겼다.
사랑방 손님이 떠나자 어머니는 찬송가책 갈피에 끼워둔 마른 꽃송이를 버린다. 사랑방 손님이 좋아한 달걀도 더 이상 사지 않고 풍금 뚜껑도 닫아버린다. 둘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당시 사회적인 관습 때문에 사랑 손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머니를 안타까워하면서 소설을 읽었다.
◇더 읽을거리
-이름 자체가 새 봄 알리는 꽃들 있다고? ^^ 영춘화, 봄맞이, 보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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