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중 유인실은 수국 같은 여인이다. 식민지 조선의 신여성으로, 조국과 일본인을 함께 사랑하다 큰 갈등을 겪는다. 작가는 이 유인실을 수국에 비유했다. 그래서 요즘 같은 수국의 계절이 오면 떠오르는 인물이다.
유인실은 일본 유학 중 관동대지진 때 오가다와 함께 조선인들을 구했다. 귀국해서도 계명회라는 조직 사건에 연루돼 옥고도 치렀다. 계명회 연루에다 오가다와 관계가 알려지면서 어엿한 일자리 대신 야간 학교 교사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인과 사귀는 조선 여성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그만큼 엄격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오가다의 아이를 가졌을 때, 유인실은 동경에 사는 지인 조찬하를 찾아가 아이를 맡아달라고 했다. 조찬하는 오가다의 지인이기도 했다. 조찬하가 임신한 유인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러니까 유인실이 조국과 일본인 연인 사이에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조찬하는 유인실이 수국 같다고 느낀다. ‘토지’ 15권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일이라도, 제가 한 사람 보내드릴까요?”
“아닙니다. 아직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요.”
“식사 준비까지 하시려면… 그리고 방도 어디 아래층으로 옮기든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인실은 순간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중략) 역시 연민이었다. 그것은 찬하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연민 때문이었다. 찬하는 지금 자기집 뜰에 한창인 수국(水菊)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축축한 음지에서 흐드러지게 핀 수국, 병자 방에는 꽂지 않는다는 그 수국이 녹색으로 변했을 때, 찬하는 히비야 공원에서 녹색의 여인으로 착각한 인실의 모습을 연상했던 것이다.>
이후 유인실은 오가다의 아들을 출산해 조찬하에게 맡긴다. 아이를 맡긴 유인실은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의식을 갖고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수국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을 좋아하고 피는 시기도 6~7월 장마철, 딱 요즘이다. 꽃색은 토양의 산성농도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한다. 산성이면 청보라색, 알칼리성이면 연분홍색으로 변하는 식이다. 그래서 토양에 참가제를 넣어 꽃 색깔을 원하는대로 바꿀 수 있다.
수국이 필 즈음 숲속에서는, 요즘은 공원 화단에서도 산수국이 피어난다. 산수국은 가장자리에 곤충을 부르는 역할을 하는 무성화, 안쪽에 실제 꽃가루받이를 해서 열매를 맺는 유성화가 함께 피는 꽃이다. 야생의 산수국에서 유성화는 없애고 무성화만을 남겨 크고 화려하게 개량한 것이 바로 수국이다.
산수국과 수국의 관계와 똑같은 것이 백당나무와 불두화의 관계다. 백당나무도 전체 꽃덩이 가장자리에 무성화가 있고, 안쪽에 유성화가 있다. 백당나무에서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무성화만 남겨놓은 것이 불두화다.
최근 서울 도심에선 수국 비슷하면서 하얀 꽃이 피는 작은 나무를 볼 수 있다. 광화문 곳곳 도로를 좁히고 새 보도와 화단을 만들면서 화단에 많이 심었는데 바로 나무수국이다. 하얀 꽃봉오리가 맺혔다가 하나씩 하얗게 피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무수국은 수국·산수국과 같은 속(屬)이니 형제 식물이다.
유인실은 식민지 조국과 지배국 연인 사이에서 번민하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당찬 여성임에는 틀림 없다. 수국처럼 주변 상황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여인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유인실은 수국 같은 여인이라기보다는 불꽃 같은 여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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