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계방산에서 만난 '굳고 정한' 갈매나무

우면산 2021. 6. 3. 10:26
반응형

 

‘남(南)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시인 백석(1912~1996) 1948년 남한 문단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이 해방 직후 만주를 헤매다 신의주에 도착했을 즈음 쓴 시라고 합니다. 백석은 이 시에서 절망적인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외롭게 눈을 맞고 서 있는 갈매나무로 표현했습니다. 신경림 시인은 책 시인을 찾아서에서이 갈매나무야말로 백석의 모든 시에 관통하는 이미지라고 극찬했습니다. ^^

 

인천수목원 갈매나무.

 

갈매나무가 얼마나 대단한 나무이기에 백석이 드물다, 굳다, 정하다 등 형용사를 세 개나 붙였을까요? 갈매나무는 국가표준식물목록에도 높이 5m까지 자란다고 소개한, 그리 크지 않은 나무입니다. 암수가 다른 나무인데, 5~6월 작은 황록색 꽃이 피고 가을에 콩알만 한 검은 열매가 열립니다. 아래 사진처에서 볼 수 있듯이 작은 가지 끝이 뾰족한 가시로 변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평창 한국자생식물원에서 만난 갈매나무. 작은 가지 끝이 뾰족한 가시로 변하는 것이 특징이다. 콩알만 한 검은 열매도 보인다.

 

저는 수목원에 갈 때마다 갈매나무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으면 살펴보았습니다. 갈매나무가 있는 수목원으로 안면도수목원이 대표적입니다. 아예 갈매나무원을 만들어 여러 종류의 갈매나무를 모아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나무들이 작은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전주수목원에는 상당히 큰 갈매나무가 여러 그루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갈매나무조차 좀 꾀죄죄한 모습입니다. ^^ 이밖에 인천수목원, 오산 물향기수목원, 평창 한국자생식물원 등에서도 갈매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동안 제 머리 속 갈매나무 이미지는 그나마 제일 근사한 전주수목원 갈매나무였습니다. ^^

 

전주수목원 갈매나무.

 

갈매나무가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어서 드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굳고 정한 나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무가 구부러져 있는 경우가 많고 가지도 제멋대로 뻗어 그저 그런 나무 중 하나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청춘이다'의 저자 고주환씨는 "갈매나무는 땔감 말고는 쓸모가 없고, 뾰족한 가시가 달려 그마저도 그리 여의치 않은 나무"라며 "어떤 연유로 백석의 시상에 '굳고 정한' 이미지로 등장하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씨처럼 갈매나무에 관심을 갖다가 실제로 갈매나무를 보고 실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

 

그래서 백석이 다른 나무를 갈매나무로 착각한 것 아닐까하는 추측까지 있었습니다. 해방 전후 나무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때여서 백석이 다른 나무를 갈매나무로 혼동했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아래 들메나무는 갈매나무와 이름도 비슷하고 높이 30미터까지 시원하게 자라는 나무인데, 백석이 말하는 갈매나무가 들메나무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

 

들메나무. 곧고 시원하게 자라는 나무다.

 

그런데 지난 주말 강원도 계방산(홍천군과 평창군 경계)에 갔다가 정상 부근에서 백석의 시 이미지에 딱 맞는 갈매나무를 만났습니다. 우선 높이가 10미터가 넘어 보이는 큰 나무였고 가지가 제멋대로 뻗지 않고 정갈하게 자란 나무였습니다. 특히 이날 비가 내리고 안개까지 끼여서 그런지 신령스러운 느낌마저 주었습니다. ^^

 

계방산 갈매나무.

 

같이 간 전문가는이 나무처럼 큰 갈매나무는 주로 고갯마루에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위 옆은 아니지만 이 역시 백석 시 이미지와 딱 맞는 얘기입니다. 이 나무를 보면서 세상 일을 함부로 재단하면 안되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통감했습니다. 시인의 고향(평북 정주)에 갈매나무가 자라는 '갈매나무고개'가 있다는데 그 고개 갈매나무는 계방산 갈매나무보다 더 곧고 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

 

 

◇백석 시 관련해 더 읽을거리

 

-갈매나무 &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관람 후기  

 

-'서울 화양연화'라는 예쁜 책 이름풀이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