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능소화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저녁 경의선숲길을 걷다 보니 벽 또는 지지대 등 다른 물체를 타고 오르면서 나팔 모양 주황색 꽃을 피우는 꽃이 있었습니다. 능소화입니다. ^^
좀 있으면 서울 북촌 등 주택가는 물론 경부고속도로·강변북로의 방벽, 남부터미널 외벽 등에도 연주황색 능소화가 필 것입니다. ^^ 근래에 워낙 많이 심어서 그런지 능소화 보기가 쉬워졌습니다.
박완서 작가를 상징하는 식물을 셋만 고른다면 무엇일까요?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싱아겠지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는 시큼한 여러해살이풀 싱아가 여덟 살 소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싱아는 박완서 소설의 상징과도 같은 식물입니다.
작가는 한 산문집에서 “책 중에 싱아란 소리는 네 번 밖에 안 나오는데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며 “싱아가 중요한 건 아니다. 싱아는 내가 시골의 산야에서 스스로 먹을 수 있었던 풍부한 먹거리 중의 하나였을 뿐 산딸기나 칡뿌리, 새금풀(괭이밥)로 바꿔 놓아도 무방하다”고 했습니다. 작가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 어린 날의 가장 큰 사건이었던 자연에 순응하는 사람에서 거스르고 투쟁하는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받은 문화적인 충격이랄까 이질감에 대해서다. 나는 아직도 그런 이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싱아 다음으로 공동 2위쯤인 꽃이 능소화와 박태기나무 꽃 아닌가 싶습니다. ^^ 박완서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능소화는 여주인공 현금처럼 화려한 ‘팜므파탈(femme fatale)’ 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능소화가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기도 하고, ‘장작더미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도 합니다. 박태기나무 꽃은 ‘친절한 복희씨’에 나옵니다. ^^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능소화가 나오는 대목을 좀 보겠습니다. 여주인공 현금은 이층 집에 살았는데, 여름이면 이층 베란다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타고 능소화가 극성맞게 기어올라가 난간을 온통 노을 빛깔로 뒤덮었다고 나옵니다. 현금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능소화가 만발했을 때 베란다에 서면 마치 내가 마녀가 된 것 같았어. 발 밑에서 장작더미가 활활 타오르면서 불꽃이 온 몸을 핥는 것 같아서 황홀해지곤 했지."
그런 현금을 바라보는 남자 주인공 영빈도 가만 있지 못하겠지요? 그무렵 영빈은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그 무렵 그(영빈)는 곧잘 능소화를 타고 이층집 베란다로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꿈 속의 창문은 검고 깊은 심연이었다. 꿈 속에서도 그는 심연에 다다르지 못했다. 흐드러진 능소화가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어 그의 몸 도처에 사정없이 끈끈한 도장을 찍으면 그는 그만 전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야릇한 쾌감으로 줄기를 놓치고 밑으로 추락하면서 깨어났다.>
능소화(凌霄花)의 한자는 능가할 능(凌)에 하늘 소(霄), 꽃 화(花)여서 해석이 만만치 않은 글자 조합인데, ‘하늘 높이 오르며 피는 꽃’이란 뜻입니다. 덩굴이 10여 미터 이상 감고 올라가 하늘을 온통 덮은 것처럼 핀다고 이 같은 이름이 생긴 것 같습니다. 담장이나 벽을 타고 올라가는 능소화도 괜찮지만, 고목을 타고 올라가는 능소화가 가장 능소화다운 것 같습니다. ^^ 능소화는 제가 워낙 좋아하는 꽃이라 올여름 능소화 얘기를 한두 번 더 전할 것 같습니다. ㅎㅎ
◇능소화 관련해 더 읽을거리
-황홀한 감각, 홍자색 박태기나무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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