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길을 가다 보면 하얀 치자꽃이 핀 것을 볼 수 있다. 초여름 치자꽃은 신선하면서도 달짝지근한 향기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청준의 단편 ‘치자꽃 향기’를 읽고 치자꽃 향기가 여인의 향기임을 알았다. ^^
이 소설에서 치자꽃 향기는 에로틱하다. 소설의 화자인 남편은 어느 날 아내에게 황당한 부탁을 한다. 자기의 절친 중에 한달에 한 번쯤 여자 알몸을 훔쳐보지 못하면 정상생활이 불가능한 친구가 있는데, 벌써 몇달째 여자 알몸을 보지 못해 거의 미쳐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친구를 위해 보름달이 뜬 날 밤에 마당 우물가에서 한 번만 멱을 감아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는 처음에 당연히 펄펄 뛰며 미친놈 취급을 했으나, 계속 절실하게 부탁하자 마침내 승낙한다. 드디어 약속한 날, 우물가에 치자꽃이 피어 있다.
<아내는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우물 곁 치자나무꽃 곁에 뽀얀 달빛을 받고 서 있었다. 달빛에 젖은 아내의 알몸은 짐작했던 대로 그 생감이나 곡선이 휠씬 부드럽고 유연해 보였다. (중략) 그녀는 그냥 온몸으로 달빛을 빨아들이며 입상처럼 묵연한 자세로 환한 밤 치자꽃을 향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생각이 난 듯 이따금 한 번씩 그 번쩍거리는 달빛을 향수처럼 어깨에서 조용히 씻어 내리곤 할 뿐이었다.
비로소 그 아내로부터 훈훈한 치자꽃 향기가 지욱의 코를 찔러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밝은 달빛으로 하여 더욱 흐드러져 보이는 그 샘가의 치자꽃으로부터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욱에겐 그게 또한 여인의 밤냄새였다.>
이청준의 치자꽃 향기는 이처럼 여인의 향기를 넘어 여인의 밤 냄새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친구는 핑계일 뿐 관음증 환자는 남편 자신이었다. 그러고보니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도 가장 육감적인 등장인물인 외서댁이 처녀 시절에 유달리 좋아했던 꽃이 치자꽃이었다.
이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76년 발표한 작품이다. 이런 파격적인 내용에 당시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했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환상의 중요성을 보여준 작품’, ‘이른바 심미적 거리를 다룬 것으로,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독자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로 대치시킬 수도 있다’고만 평했다(동아일보 1976년 11월 22일자). ^^
조선 세종 때 양희안이 쓴 책 ‘양화소록’은 “치자는 네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 꽃 색깔이 하얗게 윤택한 것이 첫째요, 꽃향기가 맑고 부드러운 것이 둘째요,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것이 셋째요, 열매로 노란색을 물들이는 것이 넷째이다. 치자는 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했다. 치자나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치자나무는 꼭두서니과에 속하는 상록 작은키나무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나무가 아니라 중국이 원산지다. 그래서 누가 심지 않으면 이 땅에서 절로 자라지는 않는다. 제주도 등 남쪽 지방에 가면 밖에서도 잘 자라지만, 중부지방에서는 밖에서 겨울의 추위를 이기지 못해 화분에 심어 가꾼다.
여름에 피는 꽃은 꽃잎이 대개 6개로 갈라지는데, 꽃 색깔은 약간의 우윳빛이 나는 듯한 흰색이고, 꽃잎이 좀 두텁다. 꽃은 흰색이다가 점점 노래지는데, 이해인 수녀가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란 시에서 ‘7월은 나에게/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하얗게 피었다가/질 때는 고요히/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이라고 잘 묘사했다.
가을에 익는, 주홍색의 껍질을 가진 열매는 우리나라 전통염료 중 대표적인 황색 염료다. 치자(梔子)라는 이름은 열매 모양이 손잡이가 있는 술잔 ‘치(巵)’와 닮았다고 여기에 나무목(木)자를 붙인 것이다. 오늘은 요즘 많이 피는 치자꽃에 대해 알아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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