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꽃치 망태기엔 칡꽃·들국화·동백꽃, 박상률의 '봄바람'

우면산 2020. 8. 6.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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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률의 『봄바람』은 열세 살 섬 소년의 성장과 방황을 따뜻하게 그린 성장소설이다. 동네 여자아이와 풋사랑, 서울에서 전학온 여자아이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성공을 꿈꾸며 시도한 첫 가출 등이 주요 이야기다. 1997년 첫 출간이후 개정판이 거듭 나오며 이제 ‘성장기를 거친 모든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출판사 설명이다.

 


주인공은 진도 농촌마을에 사는 열세 살 소년 훈필이다. 마을 아이들은 뭍으로 나가 성공해 돌아오는 것이 꿈이다. 훈필이 역시  넓은 세계를 동경하고 있다. 그러나 궁색한 가정 형편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어느날 아버지는 훈필이 몫으로 염소 한 마리를 사 온다. 새끼를 늘려 중고교에 갈 학비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훈필이는 염소를 열심히 돌본다. 염소 새끼를 늘려 푸른 목장을 세우고, 동네 여자아이 은주와 결혼해 푸른 목장을 경영하는 꿈에도 부푼다. 그런데 서울에서 전학 온 여자아이에게 마음이 끌리는 와중에 애지중지 키운 염소가 허망하게 죽는다. 훈필이는 마침내 하루라도 빨리 도시로 나가 성공하겠다며 가출을 한다. 그러나 뭍으로 나가자마자 집에서 갖고 나온 돈을 모두 털리고 사흘 만에 섬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봄바람이 불면 어김없는 시골 청소년들의 가출 행렬, 품앗이와 소문내기 같은 어른들의 해학적인 삶, 지루한 교장과 담임선생님의 훈화, 동네 이장의 마이크 소리 등 어릴 적 겪어본 일들이 많아서인지 공감도 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진한 남도 사투리도 정겹다.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이 특히 내 관심을 끈 것은 망태기에 늘 꽃을 꽂고 다니는 동냥치 ‘꽃치’가 나온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 소설을 찾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꽃치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망태기에 가득 담은 꽃과 노랫가락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동냥치다. 꽃치가 꽂고 다니는 꽃은 당연히 ‘그 계절에 피는 꽃’이었다. 봄에는 찔레꽃, 여름엔 칡꽃, 가을엔 들국화, 겨울엔 동백꽃과 같은 식이다. 칡꽃에서 동백꽃까지 꽃이 나오는 장면을 보자.

 

<망태기엔 어김없이 꽃이 가득 꽂혀 있었다. 이번에 꽂고 온 꽃은 불그스름한 칡꽃이 있다.칡덩굴이 망태기를 친친 감고 있었고, 칡꽃과 잎사귀가 온통 망태기를 뒤덮고 있었다.>

 

칡꽃과 칡줄기.

 

<추석을 앞뒤로 해서 거의 달포 가량 보이지 않던 꽃치가 들국화가 피어남과 동시에 고개를 넘어왔다. 그의 망태기엔 노란 들국화와 하얀 들국화가 잔뜩 피어 있었다.>

 

하얀 들국화라면 구절초를 말할 것이다.

 

<꽃치는 고갯마루에 군락을 이룬 동백 숲의 한쪽 언덕에 비스듬히 기대어 이를 잡고 있었다. 이를 잡는 걸로 보아 꽃치의 몸에도 분명 따뜻한 피가 흐르리라. (중략)

꽃치의 망태기엔 동백꽃 수십 송이가 꽂혀 있었다. 마치 망태기에 처음부터 동백꽃이 피어 있던 것처럼 보였다.>

 

동백꽃.

 

칡꽃은 이미 얼마전 ‘맑고 달콤한 칡꽃 향기 맡아보세요 ^^’라는 제목으로 소개했고, 들국화와 동백꽃은 조만간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디에나 흔한 찔레꽃이 나오는 것도 반갑다. 그것도 좋아하는 동네 여자아이 은주를 생각할 때 나오고 있다. ^^

 

<산으로 가는 길 옆 밭둑의 울타리를 이룬 찔레나무에 하얀 찔레꽃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누가 일부러 심은 적도 없는데 밭둑의 울타리로 스스로 자라 있는 찔레나무. 찔레나무는 그 자리가 아주 잘 어울렸다.

나는 찔레나무의 가시를 피하며 여린 찔레순을 꺾어 입에 물고 걸어갔다.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갑자기 은주 생각이 났다.

‘은주헌티도 찔레순을 꺾어다 줄까? 아녀, 은주헌틴 물병에 꽂아 놓으라고 찔레꽃 줄기를 몇 가닥 꺾어 주는 게 좋것어. 근디 가시가 있은께 조심해서 다뤄야 될 틴디...>

 

찔레꽃. 장미과라 향기도 좋다.

 

어려서 뽑아먹은 삐비가, 삘기가 아니라 당당하게 ‘삐비’가 나오는 소설을 처음 보았다. ^^ 삐비는 삘기의 사투리인데, 우리 동네에선 삐비라고 불렀다. 삘기는 여러해살이풀인 띠의 어린 꽃이삭이 밖으로 나오기 전에 연한 상태인 것을 말한다. 언덕이나 밭가에 많은 삘기를 까서 먹으면 향긋하고 달짝지근했다. 그러나 삘기는 쇠면 먹지 못하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기간이 잠깐이었다.

 

<동생을 돌보고 염소를 기르는 일만으로도 꽤 바빴지만, 머릿속은 온통 은주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염소를 데리고 산에 오르내릴 때마다 산으로 가는 밭둑이나 산언덕에 삐비가 있으면 뽑아 모았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씹기에 부드러운 여린 순만 모았다. 기회를 보아 은주에게 주고 싶어서였다.>

 

띠 군락. 띠의 어린 꽃이삭이 밖으로 나오기 전에 연한 상태인 것이 삘기다.

 

남도 지방이 배경인 소설답게 배롱나무집도 나왔다. 아래는 배롱나무집이 나오는 대목이다. 소설에 배롱나무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지만 궁금한 점이 남는 분들을 위해 얼마 전에 쓴 글 ‘100일 동안 붉을 배롱나무꽃 피다’ 링크를 남긴다.

 

<월남 갔던 배롱나무집 셋째 아들이 돌아온 것이다.

그 집 마당엔 오래전부터 나뭇가지가 미끌미끌해서 원숭이도 미끄러져 내린다는 배롱나무가 있어서 배롱나무집이라고 불린다. 배롱나무는 또 간지럼을 잘 탄다고 하여 아이들은 어쩌다 그 집에 들어가면 매끌매끌한 나뭇가지를 만지며 간지럼부터 태우곤 했다.

아이들은 저녁이면 배롱나무집으로 몰려들었다. 월남에서 당당하게 돌아온 셋째 아들의 무용담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월남에서 베트콩 잡은 이야기를 신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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